아침마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

일곱 시 사십 분이었다.
나는 아들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있었다.
바르는 게 아니라 문지르고 있었다.

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!!

그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.
아들은 로션이 눈에 들어갔다고 울었다.
나는 그 울음을 뚫고 양말을 신겼다.
가방은 열린 채로 현관에 있었다.
물통을 안 넣은 게 그때 보였다.
현관문을 닫으면서 시계를 봤다.
칠 분 늦었다.

아직 방학이다.
다음 주면 개학이고, 이 아침이 매일이 된다.


나는 세 번째부터 올라온다.

한 번 말할 때는 괜찮다.
두 번째도 참을 만하다.
세 번째에 목소리가 낮아지고 손이 빨라진다.
그때부터 내 손은 아이를 돕지 않는다.
아이를 처리한다.

세 번을 말했는데 안 들으면 나는 그걸 이렇게 읽는다.

나를 우습게 본다.
엄마 말은 안 들어도 되는 말이라고 배웠다.
이대로 크면 큰일 난다.

이 세 줄이 아침 칠 분 안에 다 지나간다.


며칠 뒤 아침에 나는 내 손을 봤다.

로션을 바르는 손이 거칠었다.
입으로는 화를 내고 손으로는 해주고 있었다.

이게 제일 나쁜 조합이다.

안 해주고 화도 안 내면 아이가 자기 몫을 감당한다.
해주고 화도 안 내면 그건 그냥 돌봄이다.
그런데 해주면서 화를 내면 아이는 두 개를 같이 배운다.
엄마가 해준다는 것.
엄마는 늘 화가 나 있다는 것.

나는 매일 아침 그 두 개를 같이 먹이고 있었다.


그다음 주에 나는 참아보기로 했다.

소리가 올라올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.
사흘은 됐다.
나흘째 아침에 더 크게 터졌다.

참는 걸로는 아무것도 안 끝났다.
누른 만큼 뒤에서 불어나 있었을 뿐이다.

그리고 참는 동안 나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.
내가 이만큼 참았는데.
이 문장이 떠오르면 그건 참은 것이다.
관점을 바꾼 사람은 계산을 안 남긴다.


남편은 그 시간에 집에 없다.

여섯 시 반에 나간다.
나가기 전에 아이 방을 한 번 들여다본다.
자는 얼굴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는다.

그는 아침을 조용한 시간으로 기억한다.
나는 같은 아침을 소리로 기억한다.
한집인데 아침이 두 개다.

그를 탓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.
그도 여섯 시에 일어난다.
그 시간에 가 있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.

다만 아침 칠 분이 누구 몫인지 우리는 정한 적이 없다.
정한 적이 없으니까 남아 있는 사람 몫이 됐다.
남아 있는 사람이 나였을 뿐이다.


여기까지가 아이 문제다.
그런데 이건 다 표면이다.

내가 세 번째에 터지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.
아침에 뭐가 잘못되면 그게 전부 내 몫이 되기 때문이다.

지각을 하면 내가 늦게 깨운 게 된다.
준비물을 빠뜨리면 내가 안 챙긴 게 된다.
아이가 울고 나가면 내가 아침부터 화를 낸 사람이 된다.

그 아침에 나 말고 책임을 나눠 가질 사람이 없다.
그래서 나는 세 번을 못 기다린다.
기다릴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실패할 자리가 없어서다.

방학이라 여덟 번쯤 겪고 넘어갔다.
개학하면 이 아침이 서른 번이 된다.


아들 쪽에서 보면 이 아침은 다르게 생겼다.

여덟 살한테는 계획이라는 게 없다.
엄마를 열받게 하려고 일어나는 아이는 없다.
그냥 양말보다 재미있는 게 방바닥에 있었을 뿐이다.

그리고 그 아이가 매일 아침 보는 얼굴이 있다.
자기한테 화가 나 있는 엄마 얼굴이다.
나는 하루에 한 번 지른다고 생각하는데
아이 쪽에서는 그게 매일 아침이다.

그렇다고 내 아침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.
아이한테 나쁜 뜻이 없다는 걸 알아도 내 손은 여전히 거칠었다.
아이를 이해하는 일과 아침이 굴러가는 일은 따로 논다.


지워도 되는 쪽이 있다.

나를 우습게 본다는 해석.
세 번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한다는 기준.
오늘 아침이 망하면 하루가 망한다는 예감.
소리를 지르고 나서 밀려오는 죄책감의 크기.
내가 이만큼 참았는데, 하는 계산.

이건 전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.
아이가 나한테 건넨 적은 없다.

지켜야 하는 쪽도 있다.

매일 같은 시각에 똑같이 터진다는 것.
하루가 아니라 방학 내내 그랬다는 것.
참아봤는데 나흘 만에 더 크게 터졌다는 것.
그 아침에 대신 서줄 사람이 없다는 것.
말보다 손이 먼저 거칠어졌다는 것.
아침을 맡은 사람이 정해진 적 없다는 것.

이건 해석이 아니다.
반복되는 사실이고, 옆에서 봐도 보인다.

대부분은 둘 다다.
아이가 나를 우습게 본다는 건 지울 해석이고,
그 해석이 하필 아침 칠 분 안에서 매일 켜지는 건 지켜야 할 신호다.

실제 상황 하나를 갈라본 글 → 제사를 없앴는데 명절은 그대로였다


밤 아홉 시에 나는 아들 방에 앉아 있었다.

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.
아침에 지른 소리가 그제야 내 귀에 들렸다.

내일은 참지 않기로 했다.
참는 건 이미 해봤고 안 됐다.
대신 아침을 다시 짜기로 했다.

오늘 밤에 아이한테 미리 말해둔다.
여덟 시 십 분에 문을 연다고.
양말을 안 신었으면 손에 들고 나가는 거라고.
울어도 나간다고.

그리고 하나 더 한다.
개학 준비물 목록을 종이에 적어서 냉장고에 붙인다.
절반에는 남편 이름을 쓴다.
도와달라는 말은 안 쓴다.
날짜만 적는다.

아침에 실패할 자리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.
지금은 그 자리가 나 하나뿐이다.
하나뿐이면 매번 내가 터진다.

개학까지 나흘 남았다.
나흘이면 종이 한 장은 붙일 수 있다.


이런 식으로 하나씩 갈라보는 글을 주에 한 번 보낸다.
지울 해석과 지켜야 할 신호를 나눠서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