제사를 없앴는데 명절은 그대로였다

열한 시쯤이었다.
시댁 식구들과 간 여행이었고 나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.
창 너머 모래밭에서 남편이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.
바지를 걷고 물까지 들어가 있었다.
디저트 접시가 앞에 있었다.
아이들이 보이는 자리를 일부러 골라 앉았다.
어머니와 시누이가 그걸 보면서 말했다.
“어쩜 저렇게 잘 놀아주니.”
“진짜 좋은 아빠야~”

맞는 말이었다.
나도 그렇게 생각한다.
그런데 세 번째쯤 듣고 나니 커피 맛이 없어졌다.

내 표정이 굳는 게 느껴졌다.
컵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.
좋은 아빠 맞는데.
나는 왜 이게 듣기 싫지?

인정하기가 싫었다…
그 마음이 스스로도 이상했다.


집에 와서 며칠을 생각했다.

평소에 아이들 씻기는 건 나다.
숙제 봐주는 것도 나다.
아픈 밤에 일어나는 것도 나다.

그날 모래밭에서 삼십 분 논 사람은 좋은 아빠가 되었고
매일 하는 사람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.

내가 상한 건 남편 때문이 아니었다.
그 자리에서 내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.


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이야기였다.
그런데 이건 다 표면이다.

작년부터 명절에 제사를 안 지낸다.
어머니가 그만하자고 하셨다.
새벽부터 부엌에 서 있던 게 통째로 없어졌다.
좋을 줄 알았다.

제사가 없어진 첫 명절이었다.
할 일이 없으니 앉아 있으라고들 했다.
그래서 앉아 있었다.

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.
아침 먹고 눕고 과일 깎고 눕고.
텔레비전 소리만 계속 났다.
먹고 자고 떠들고 먹고 자고 떠들고.

성묘를 간다는 말에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났다.
산이 높고 길이 가팔랐다.
아이들 손 잡고 올라가야 하는데도 좋았다.
살 것 같았다!!

일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.
일을 없애줬는데 나는 편해지지 않았다.
나는 그냥 움직이는 게 좋은 사람이다.

그러니까 명절이 불편했던 건 일 때문이 아니다.
움직이는 사람은 나인데 움직였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것.
그게 진짜다.


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걸린다.

남편한테 뭘 해달라는 말이 입에서 잘 안 나온다.
말할 시간에 내가 움직이는 게 빠르다.
그래서 그냥 내가 한다.

엄마가 그랬다.
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다.
그걸 보고 자란 나도 몸이 먼저 움직인다.
피보다 환경이 무섭다.

그 자리에서 내가 안 보인 데는 내가 만든 몫도 있다.
아무도 나한테 하라고 한 적이 없다.
내가 그냥 했을 뿐이다.

이걸 인지하면 억울함이 좀 줄어든다.
줄어드는데 없어지지는 않는다.

명절에는 남의 집 얘기를 듣게 된다.
누구네 남편은 전을 부친다더라.
누구네는 아예 시댁을 안 간다더라.

들으면 잠깐 부럽다.
그런데 그 집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.
가만히 앉아서 대접받는 명절을 나는 이미 해봤다.
지겨웠다.

부러운 게 아니었다.
나는 나한테 맞게 살고 있구나 확인하는 시간이었다.


어머니 입장도 생각해봤다.
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되셨다.
나이 들수록 아들이 아버님을 닮아간다고 하셨다.
그 아들을 서른 해 키우셨다.

칭찬할 자격이 있는 분이다.
아들에 대한 지분으로 치면 어머니가 대주주다.
그걸 인정한다.

주체적으로 살자고 늘 다짐했다.
그래놓고 시댁 인정에 목이 말라 있었다.
아 내 한계가 여기까지구나.

그렇다고 그날 내가 안 보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.
사정을 알면 이해는 되는데 자국은 남는다.
그 둘은 따로 논다.


지울 해석 쪽이 있다.
어머니가 아들을 칭찬하는 것은 어머니 일이다.
그 집 방식이 내 집과 다른 것도 그 집 일이다.
남편이 그 집에서 아들로 돌아가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.
명절에 남편이 편해 보이는 것도 그 사람 집이라 그렇다.
시댁의 인정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면 내 목줄을 남 손에 쥐어준 것이다.
이건 내가 놓으면 없어진다.

지켜야 할 신호 쪽도 있다.
명절마다 움직이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면.
말했는데 다음 명절에도 똑같다면.
끝나고 며칠씩 몸이 안 풀린다면.
나 말고 다른 사람도 그 집에서 같은 자리에 놓인다면.
명절 얘기만 나와도 며칠 전부터 잠이 안 온다면.
이건 마음을 고쳐먹어도 없어지지 않는다.

대부분은 둘 다다.
칭찬이 듣기 싫었던 건 지울 쪽이고
그게 하필 그렇게 아팠던 이유는 지켜야 할 쪽이다.


시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이박 삼일을 보내고 가신 적이 있다.
그 다음 월요일 오전에 나는 댄스 수업에 갔다.
춤이 아니었다.
살풀이에 가까웠다.
수업이 끝나고 거울을 봤다.
얼굴이 벌겠다.

그때는 웃겼는데 지금 보면 증거다.
그렇게 풀어야 했다는 건 그만큼 참았다는 뜻이다.
참은 것은 관점을 바꾼 것이 아니다.
참으면 계산이 남고 관점을 바꾸면 계산이 안 남는다.

이번 추석에 나는 하나만 하기로 했다.
내가 뭘 했는지 나한테만 적어두기로 했다.
적는 데 오래 안 걸린다.
전 몇 장 부쳤는지, 몇 시에 일어났는지.
한 줄이면 된다.
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.
그 집에서 안 보이는 걸 나까지 모르고 있으면 안 되니까.

가기 싫으면 안 가는 것도 답이다.
다만 가기로 했다면 그것도 내가 고른 것이다.
어쩔 수 없이 가는 것과 골라서 가는 것은 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다르다.

지금 여덟 시 사십 분이다.
추석까지 다섯 주 남았다.


이런 식으로 하나씩 갈라보는 글을 주에 한 번 보낸다.
지울 해석과 지켜야 할 신호를 나눠서.